Anne of Concrete Gables :: 골든 패스 파노라믹

Anne of Concrete G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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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pass Panoramic 1등석,
신기한 듯 바깥을 쳐다보는 동생
07.01.11



유럽으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화려한 휴가>가 크랭크인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영화 생각을 해다 잠이 들어서 그런 건지 꿈에 김상경이 나왔다. 김상경이 거액의 사기인지 횡령인지 어쨌든 금융 범죄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서 숨어다니는데 종종 나에게만 연락을 해주는, 하여간 유치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다. 그래도 용의수배자와 몰래 몰래 연락을 한다는 게 상당히 스릴 있어서 즐거운 꿈이었다. (내가 겨울부터 저 영화를 그렇게 기대했건만 한참 뜸 들여서 개봉해놓고 내 뒤통수를 치다니)

꿈이 너무 재미있어서 깨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여덟시 반 쯤 느지막히 일어나 아홉시 십분 쯤에 아침을 먹고 열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호스텔에서 '체크아웃은 열시까지' 라고 하는 바람에 열한시 팔분에 출발하는 루체른행 골든 패스 파노라믹을 탈 우리는 시간이 붕 떠서 하는 수 없이 인터라켄 동역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

......................그날 아침 인터라켄 동역은 순 한국사람 뿐이었다. 노란 머리가 한두 명이었고 죄다 한국사람이라 괜히 민망했다.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사람, 인터라켄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열차가 출발하자 역사가 조금 한산해졌다. 열차가 출발한지 몇분 되지 않아 우리와 마주보는 벤치에 앉아 있던 스위스 할머니가 웬 지갑 하나를 주워서 옆자리의 한국 남자에게 건네줬다. 지갑 안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니 방금 전에 융프라우로 올라간 일행 중 한 사람의 지갑이었다. 지갑을 받은 남자는 오늘 인터라켄 밖으로 나가는 사람인지라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내게도 물어보다가 결국 information에 맡기고 왔다. 지갑 흘리고 간 사람, 찾았을까? 많이 당황했을텐데.



한시간 기다려서 드디어 골든 패스 파노라믹을 탈 수 있었다.
이 열차,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정말 킹왕짱이었다.
처음에 인터라켄 근처의 호숫가를 지날 때는 안개가 하도 심하게 껴서 가시거리가 한 10미터 되는 것 같아 걱정했다. 이거 관람열차 타서 경치구경은 하나도 못하는거 아닌가 하고. 인터라켄에서 보낸 2박 3일중 도착한 날 빼고 둘째날 셋째날은 안개가 심해서 경치 구경을 못했다. 융프라우가 보이는 방이 숙소였는데도.

안개 걱정은 기우였다. 인터라켄을 벗어나자 안개가 싹 걷히고 그림 같은 경치가 펼쳐졌다. 우리가 창문을 열어놓고 구경하자 역무원 아저씨가 와서 저쪽 가면 창문 다 열어놓고 놀 수 있는 coach가 있으니 글루 가서 놀으라고 했다. 그래서 아저씨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갔는데 아저씨가 말한 그 coach가 그건 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그만 1등석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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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pass Panoramic 1등석


골든패스열차의 1등석은 전면 통유리라더니 진짜였다. 경치 구경하기엔 아주 그만이었다. 한번 구경해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여행객이라 1등석은 꿈도 못꿨는데 어쩌다 들러버렸으니 잠깐 자리잡고 앉아 사진도 몇장 찍었다.

1등석이 통유리인 건 좋은데 창문이 안 열리길래 에이 뭐야 하고 1등석 칸마저 지나쳐 계속 앞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열차 진행방향으로 계속 움직였는데 맨 끝으로 가니 아무것도 없었다. 깜짝 놀랐다. 그 객실이 마지막 칸이 였고 앞이 뻥 뚫려있었다. 조종칸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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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마지막 칸 위에서 찍은 눈 앞의 선로

이번 역에서는 반대 방향 맨 끝에 조종칸을 연결해서 반대 방향으로 나갈 모양이었다. 유럽은 이렇게 역에 정차하고 나서 다시 출발할 때 열차 진행방향이 종종 바뀌곤 한다. 런던에서 에딘버러 가는 길에, 뉴캐슬에서 열차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곧 유럽에선 열차가 반대로 움직이기도 한다는 사실이 기억나서 안심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창문 열어놓고 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 역무원 아저씨는 이번엔 친절하게도 그 다음다음 칸으로 데려다 주었다. 아무래도 창문 열어놓는게 다른 승객들에게 실례가 될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아저씨가 데려다 준 칸은 아까 지나쳐버린 아무것도 없는 창고같은 휑한 칸이었다. 좌석이 없길래 난 창고인 줄 알고 그냥 지나쳤었다. 그 칸 창문을 전부 열어놓고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신나게 놀았다. 루체른에 도착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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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났다


정말 그림 같은 경치의 연속이었다. 어딜봐도 엽서고 달력이었다. 씽씽 달리는 열차에서 나머지 한시간 반을 창밖으로 머리 내놓고 구경하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감기 걸릴까봐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풍경이 너무 예뻐서 머리 내밀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공기도 좋고 자연도 예쁘고 스위스 정말 멋진 나라였다. 완전히 반해버렸다. 2박 3일 동안 스위스에 있으면서 난리가 났던 피부도 많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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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다 좋았지만 특히 Lungern인가 하는 그 마을 도착하기 직전의 풍경이 최고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호수마을. 정말 이 경치를 혼자 봐야 한다는게 너무너무 아쉬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 경치를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경치 구경을 하느라 2시간이 후딱 가고 루체른에 도착했다. 시내 구경을 좀 할까 하다가 마땅히 짐 맡길 곳이 없어서 바로 취리히행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취리히 도착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가는 기차는 아홉시 넘어서야 있는데 우리가 취리히 도착했을 땐 두시 반이었다. 코인락커는 5프랑이나 해서 짐을 맡길 수도 없었다. 동전 남은 거 다 긁어모으면 5프랑이야 되겠지만 그래도 간식이라도 사먹어야 하는데 돈을 다 써버릴 순 없었다. 취리히 시내 구경 역시 포기했다. 추운 역 안에서 떨기 싫어서 예정에도 없던 제네바행 기차를 탔다. 시간도 남고, 유레일패스야 어차피 하루 도장을 찍으면 하루 내내 공짜니까 제네바를 찍고 거기서 이탈리아행 열차를 탈 생각이었다.

기차 타서 신나게 잤다. 그 골든패스파노라믹에서 찬 바람을 하도 많이 쐬서 머리가 지끈지끈하던 차였다. 잠결에 Fribourg라는 안내 방송을 들었다. 지난 번 기차 안에서 만난 시끌벅적한 세가족 생각이 났다. 아줌마가 Fribourg에 들르면 연락하라고 했었는데...
로잔에 다 와서 깼더니 기차 안이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로 한가득이었다. 프랑스어 지역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기차 안내방송도 독일어보다 프랑스어가 먼저 나오기 시작했다.

스위스는 정말 신기한 동네다. 스위스에서 사용되는 공식 언어는 네가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로망스어. 프랑스 접경지역은 프랑스어, 이탈리아 접경지역은 이탈리아어, 로망스어는 산간지역 일부에서만 사용되고 나머지 대다수 지역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한다.
정치는 어떤 언어로 하는 걸까? 유명 인사들은 독일어와 불어를 둘다 할 줄 아는 걸까? TV 방송은 독일어 지역과 프랑스어 지역에서 각자 따로 제작해서 내보내는 건가?
수퍼에서 파는 상품들은 모두 독일어, 불어를 병기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표기된 상품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다국어 환경에서 살아서인지 스위스 사람들은 독일어 지역에 살더라도 불어를 어느 정도는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영어도 물론 잘하는 사람들이 많고.

제네바 도착해서 안내방송을 들어보니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가 각자 Geneve를 다르게 발음한다는 걸 알았다. 프랑스어로는 제네브, 영어는 제네바, 독일어가 특이했는데 겐프였다. 누가 독일어 아니랄까봐 -_-



제네바역에 내리자 여섯시 반, 아까 취리히역에서는 베네치아 가려면 볼로냐에서 갈아타야하는 것 밖에 없어서 여기선 직행이 있을까 기대했건만 여기서 출발하는 열차도 볼로냐에서 갈아타야 했다. 게다가 취리히발 열차와 도착 시간이 같은 걸 보니 중간에 두 열차가 만나서 합치는 것 같았다. 결국 9시 36분 출발 열차를 예약하고서 하는 수 없이 그 무거운 짐을 다 끌고 두시간 가량 제네바 시내 투어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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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광고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 그녀야말로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닐까

나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동생은 산만한 배낭을 지고 제네바역에서 나와 시내를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들들들 하는 캐리어 바퀴소리가 괜히 처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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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제네바

제네바도 호수 도시였다. 바닥이 다 보이는게 물이 정말 맑은 것 같았는데 밤이라 잘 안 보이는게 아쉬웠다.  밤이라서 뭘 제대로 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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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동상

루소 동상 한켠에서는 애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는데 동생이 누나, 여기 빨리 뜨자면서 자꾸 보챘다. -_-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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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시계와 우리의 그림자

기대했던 꽃시계는 겨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시시했고, 대분수를 보러 갔더니 여름에만 한대서 한동안 영국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영국 공원도 낮이라면 정말 예쁠 것 같았는데.


슬슬 배가 고팠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빵밖에 못 먹었다. 호스텔에서 체크아웃하면서 먹고 나온 아무 맛 안나는 빵이랑, 루체른역에서 취리히행 기차에 오르기 전에 급히 사들고 올라 먹은 치즈케익과 레몬 카스테라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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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카스테라, 치즈케익, 우유

유럽은 수퍼에서 파는 케익이 정말 맛있다더니 진짜였다. 치즈케익이 끝내주게 맛있었다. 레몬 카스테라도 맛있었는데.... 우유는 일부러 Vollmilch(영어로 하자면 full milk), 그러니까 저지방우유가 아닌 그냥 우유를 샀는데 이것도 저지방 우유 맛이었다. 유럽은 우리나라랑 우유 맛이 달랐다. 뭘 먹어도 그냥 밍밍했다. 역시 우유는 우리나라 우유가 맛있어.

저 치즈케익이 아무리 맛있었다 하더라도 아침, 점심을 전부 빵으로 때웠으니 허기가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저녁 사먹을 스위스프랑이 남아있지 않아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누나, 우리 생라면 먹자!" 하고 외치는 덕에 기분이 좋아졌다. 영국 민박집에서 몰래 훔쳐온 라면이었다. (비빔면은 베를린 민박집에서 비벼먹었는데 난 비빔면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몰랐다.)

당장 영국공원 한 켠에 앉아서 생라면을 부쉈다. 호수를 마주하고 제네바의 야경을 감상하며 생라면을 씹는 기분이 참, 한편으로는 좀 안쓰럽기도 하면서 즐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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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길에, 거북이와 악어빵





이리저리 쏘다닌 것 빼고는 한 게 없으니 라면 부숴먹고도 한시간 반이 남았다. 늦은 시간이라 무섭기도 하고 짐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기차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기차역에서 시간 때우는 거 이제 너무  지겹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챙겨 올 걸 그랬다. 짐 무거워진다고 이거 언제 읽겠냐고 책 다 빼버렸는데. 여기선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마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지겨운 한시간을 보내고 기차에 올랐다. 여섯명이 쓰는 쿠셋이었다. 짐정리를 하고 있는데 차장과 웬 무슬림 여자가 우리 방문 앞에서 한참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나랑 같은 방을 쓰는 이탈리아 남자까지 껴서 뭔가 한참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그 이탈리아 남자가 영어로 얘기해 준 바로는 그 무슬림 여자가 남자랑은 한 칸을 쓸 수 없다고, 못 자겠다고 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무슬림은 그런 문제도 있구나. 외국 나가면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닐 것 같았다.



기차가 출발하고 나서 다음 역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커플이 탔다. 그 이탈리아 남자는 영어에 프랑스어까지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일 때문에 스위스를 오고 간다고 하더니. 이 근처 동네는 하여간 2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널린 것 같았다.

저 이탈리아 남자는 우리가 쿠셋을 처음 타는 것 같이 보였는지 이것 저것 설명도 해주고 친절해서 좋았는데 새벽에 코를 어찌나 고는지 나를 괴롭게 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동생, 우리 아래 침대의 프랑스어 커플까지 모두 한숨도 못 잔 듯 했다. 우리가 볼로냐에서 내릴 때 그 프랑스어 커플도 같이 내렸다. 기차를 갈아타기까지 또 한 50분을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볼로냐역에서 베네치아행 기차를 타는 한국인이 정말 많았다.
초등학생 남매로 보이는 애들 둘을 데리고 여행하는 아줌마를 제네바 역에서 봤는데 여기서 또 마주쳤다. 이 세가족도 베네치아로 가는 모양이다.

새벽에 잠을 잘 못 잤더니 베네치아행 기차에서 두시간 동안 정신없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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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0 02:12 2007/08/30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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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수현 2007/08/30 22:41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풍경 진짜 그림 같다 쥐뿔도 모르는 꼬꼬마일 때부터 스위스는 막연하게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그리고 종교를 갖는다는 거, 생각보다 좋을거야ㅎ

    • marion 2007/08/30 23:18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응, 나도 가끔은 종교가 있다면 어떨까 할 때가 있어. 그치만 아직은 내가 종교를 간절히 원하는 것 같진 않아서. 언젠가 정말로 원하게 될지도 모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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