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01.12
베네치아의 아침
볼로냐에서 갈아탄 기차는 두시간을 달려 여덟시 십분에 베네치아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서 숙소에 전화해 위치를 물은 후 집에도 한통 전화를 했다. 숙소 Ostello Santa Fosca는 산타루치아 역에서 상당히 멀어서 꽤나 헤매야 했다. 그래도 물어물어 길을 찾아 도착했다. 체크인이 안되는 시간이라 예약부터 하고 호스텔에 짐을 맡겼다.
산타루치아 역에서 호스텔까지, 우리가 길을 헤매는 동안 몇번 마주쳤던 한국인 여자애 세명이 있었다. 알고봤더니 그 아이들도 같은 숙소를 찾고 있었던 모양인지 우리가 호스텔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중 한명은 트렁크 바퀴가 고장나서 떨어져버렸는지 불쌍하게도 그 무거운 트렁크를 힘들게 질질 끌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짐을 끌고 숙소에 도착했는데 침대가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몇분 일찍 도착해서 침대 두개를 예약한 나로서는 굉장히 미안했다. 우리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도 침대 세개가 남아있었을텐데 말이다. 혼자 한참 미안해하다가 이 호스텔은 남녀 침실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남아있었던 건 여자 침대 둘, 남자 침대 하나였고 내가 거기서 여자 침대 하나, 남자 침대를 하나 예약한 거였다. 우리가 아니었더라도 그 여자애 셋은 어차피 다른 숙소를 찾아야하는 운명이었다. 그나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고장난 트렁크부터 고쳐야 할테니 그 아이들은 가방 가게를 찾아 나갔고, 우리는 시내 구경을 위해 다시 산타루치아 역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수상버스 82번을 타고 리알토 다리로 갔다.

수상버스 정류장
말이 수상버스지 배다. 정류장이 강가에 둥둥 떠 있고 배가 정류장에 들러서 사람들을 내려주는데 그 정차 방법이 특이했다. 정류장에 박힌 말뚝과 배에 박힌 말뚝을 새끼줄로 고정시키고 배를 대어서 사람들이 타고 내리도록 했다.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버스마다 한명씩 있었는데 새끼줄을 던지고, 말뚝에 감아서 배를 고정시키는 일도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리알토 다리, 예쁘게 찍어주지 못해 미안해
중학교 시절,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가 제일이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말만 들어도 얼마나 낭만적인지. 게다가 마침 TV에서 베네치아에서 촬영한 토이의 <좋은 사람> 뮤직비디오를 열심히 틀어주던 때였다. 아무도 그걸 베네치아에서 찍었다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사진에서 보던 운하, 사진에서 본 다리, 사진에 나왔던 골목들이 분명 베네치아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만난 그 다리, 그 골목들은 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못했다.

사진으로는 얼마든지 낭만적인 베네치아의 골목
산마르코 광장까지 가는 데도 한참 헤매야 했다. 베네치아는 좁은 골목길이 너무 많아서 지도를 봐도 대체 내가 어디쯤 있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도를 보면서 같은 자리를 돌고 돌기를 한참 하다가 결국 지도를 던져버리고 per S.Marco라고 써진 이정표만 열심히 따라갔더니 좁은 골목 사이로 탁 트인 산마르코 광장이 나왔다.

산마르코 광장

'비둘기 모이 사세요'
비둘기가 너무 많아서 끔찍했다. 정말 발에 채이는 게 비둘기였다. 광장 곳곳에는 말린 옥수수 알갱이 봉지를 1유로에 파는 노점상들이 사람들에게 비둘기 모이를 주도록 유혹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자기 또래들 중에 유치하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내 동생이 그냥 지나칠리 없다. 나한테 1유로만 달라고 사정을 하더니 돈을 꺼내주자 좋다고 헤헤거리며 모이를 사서 바닥에 뿌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동생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몰려들었다. 날아다니는 돼지같은 비둘기들이 무거운 몸을 푸드덕 거리며 혹은 뒤뚱거리며 한 곳으로 몰려드는 모습은 일종의 공포였다. 사람의 손을 하도 많이 타서 약아빠지기만 한 데다 던져주는 모이를 향해 입벌리기에 바쁜 비둘기들. 두번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신이 난 동생
산마르코 성당의 입장료가 3유로라고 하자 동생이 됐다며 자기는 바깥에서 비둘기랑 놀테니 1유로만 더 주고 누나나 들어갔다 오라고 했다. 동생과 비둘기들을 뒤로 하고 나만 성당으로 들어갔다. 산마르코 성당은 성당 내부에 금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걸 구경하러 들어갔더니 대부분의 성당이 그렇듯 조명이 어두워서 금칠한 벽이 번쩍번쩍 빛나거나 하진 않았다. 1.5유로를 더 주고 보석실까지 들어갔는데 특별한 건 없었다.
성당에서 나왔더니 동생이 아직도 비둘기떼 속에서 놀고 잇었다 .나를 발견한 동생이 갑자기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게 매우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이 손에 쥐고 있던 모이봉투를 갑자기 나를 향해 흩뿌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비둘기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팔에 앉고 어떤 놈들은 내 머리까지 올라왔다. 안그래도 야간열차 타고 오느라 머리를 못 감아서 찝찝한테 비둘기 발바닥이 내 정수리를 더듬는 게 느껴지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으악 으악 소리를 지르는 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한참 후에 비둘기 떼가 떠나고 나서 다시 한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둘기 발바닥에서 묻은 '비둘기 똥 + 광장 바닥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내 까만 점퍼를 회색 점퍼로 둔갑시켰다. 휴지로 열심히 닦아내다 지쳐서 포기했다.

베네치아의 명물 곤돌라

내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한 레스토랑

내 동생 손바닥만한 콜라병. 큰컵으로 한잔이다.

광고의 한장면 같은, 옆구리에서 치즈 흘리는 라자냐 -_-
레스토랑 때문에 분노 게이지 상승한데다, 베네치아 시내도 내가 상상한 것처럼 골목 사이로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낭만적인 물의 도시가 아닌, 지저분한데다 길이 좁고 정리되지 않은 동네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시내 구경은 이쯤에서 접고 비싼 돈 주고 이왕 수상버스 1일권 끊은 거 근처의 무라노 섬에 가 보기로 하였다. 동생이 유리공예품을 사겠다고 며칠 전부터 무라노, 무라노 노래를 부른 탓도 있었다. 베네치아는 유리공예품과 종이가면으로 유명한데 그 유리공예품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곳이 무라노 섬이다.

우리는 무라노 섬 가는 중
수상버스를 타고 무라노 섬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50분 정도 걸렸지만 경치가 하도 좋아서 50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리던 베네치아의 모습이 이런 것이었다.

행위예술적인 유리공예품, 인상깊어서 찍어두었다.

유난히 화려하던 종이가면
너무 갖고 싶었던 유리공예품이 하나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마악 떨어지려고 하는데 그 물방울 속에 금붕어가 들어있는, 아이디어도 깜찍하고 참 예쁜 유리공예품이었다. 다만 38유로나 해서 살 수가 없었다. 대신 고양이 뱃속에 금붕어가 들어있는 걸 골랐다. 이것도 충분히 귀여웠다. 다른 집에서는 그집 아저씨가 마담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유리공예 귀걸이도 두개 샀다.

무라노 섬에서 베네치아 시내로 돌아가는 길

베네치아의 밤거리
Ostello Santa Fosca는 숙박비도 쌌지만 무엇보다도 운치가 있어서 좋았다. 오래 된 주택같은 건물을 호스텔로 개조해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묵었던 방은 침대가 세개 있는 방이었는데 상당히 넓고 가정집 침실 같은 분위기였다. 함께 방을 썼던 사람들이 늦게 들어와 나 혼자 욕실을 여유롭게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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