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 of Concrete Gables :: 스위스로

Anne of Concrete G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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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꼬마 아가씨, Hanya
07.01.09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라디에이터를 너무 세게 틀어서 그런 건지, 옷을 너무 두껍게 입고 자서 그런 건지 여러번 깼다. 좀 더운 것 같았다. 유럽에 온 이래 더워서 잠 못든 밤은 처음이었다. 결국 일어나서 한겹 벗고 잤더니 좀 나았다. 하지만 깊은 잠은 들지 못해서 뒤척이고 있는데 새벽 네시에 복도가 시끌시끌하더니 문이 벌컥 열리고 웬 이상한 말을 쓰는 남자애들이 들어왔다.
아니, 새벽 네시에 체크인을 하는 몰상식한 짓을 했으면 닥치고 짐정리를 해야지 불도 맘대로 막 켜고 지들끼리 웃고 떠들고 난리였다. zwei같은 단어도 들리고 자음이 많은 게 독일어 비슷하긴 했는데 아무리 들어도 독일어는 아니고, 대체 어느나라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낮고 걸걸한 목소리로 쉴새없이 뱉어내는 자음들이 정말 끔찍했다. 그러나 그 때가 차라리 행복했다는 것을 몇분 후에 깨달았다. 얘네들이 짐정리를 한답시고 한참 떠들다가 드디어 침대에 누웠는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젠 편히 잘 수 있겠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웬 천둥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난 태어나서 코를 그렇게 심하게 고는 사람은 처음 봤다. 비행장 소음 뺨치는 코골이었다. 어찌나 심하게 코를 고는지 제 코골이를 제가 못이겨 숨이 넘어가 꺽꺽대다가 잠시 잠잠해지고, 다시 코를 골다가 꺽꺽대고, 이런 사이클의 반복이었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하는 동안은 그 코고는 소리가 안들려서 행복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와서 드라이어를 찾으려고 불을 켜고 보니, 난 한 서너명 들어 온줄 알았는데 달랑 두 명이었다. 하도 시끄럽고, 코도 한 서너명 고는 데시벨이어서 당연히 세명은 될 줄 알았다. 그 꺽꺽대는 녀석이 혼자 세명 분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도 코골이가 우렁차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짜증나서 드라이어를 웽 하고 틀어 머리를 말리는데도 두 녀석 다 깨지 않고 잘만 잤다. 그 방에 계속 있다가는 청력에 이상이 생길 것만 같아 6시에 방을 나와 체크 아웃을 하고 중앙역으로 갔다. 7시 12분 기차였다. 기차 시간이 일러서 다행이었다. 안 그럼 새벽부터 뭐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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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ya와 함께

취리히행 기차에 올라 두시간 반 정도 계속 잤다. 자다 일어났더니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은 아줌마가 자기 딸이 내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한다고 영어로 물었다. 그러고보니 저 아줌마, 내가 잠들기 전에 기차에 올라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한테 유창한 독일어로 뭐라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자리로 이동했었다. 아마 애들과 떨어진 자리를 예매한 모양이었다. 아줌마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자리 잡는 걸 보고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애들과 영어로 떠들고 있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더니 유럽 여행 중이냐, 어디어디 가봤냐 이것저것 궁금해했다. 독일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 게 이상해서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했더니 스위스 사람인데 싱가폴에 산 적이 있어서 영어를 쓴다고 했다. 두살 반짜리 아들내미 Remi가 상당히 거칠어서 아줌마가 시종일관 "Gentle!!"을 외쳤지만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다섯살인 Hanya가 날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여서 자꾸 말을 걸고 이것저것 보여주고 싶어했다. 아줌마가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애들 아빠는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빠가 바빠서 해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듯 했다.
아줌마는 금발에 백인이고, 우리엄마는 까만머리에 동양인이니까 이런 말 하는 건 이상하지만 아줌마 분위기가 묘하게 우리 엄마랑 닮아서 어쩐지 친근했다.

얼마 후에 Hanya네 앞 좌석에 독일인 엄마와 아들이 탔다. 아들은 우유병으로 식사를 하는 걸 보니 어린 듯 했다. 위의 사진에도 보이는 저 우유병을 문 귀여운 백금발 꼬마다. 얘는 독일어밖에 못 알아듣고, Hanya와 Remi는 영어 밖에 못하니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영어와 독일어가 가능한 아줌마가 의사소통을 도와주었다. 난 저 백금발 꼬마가 하도 말을 안하길래 너무 어려서 말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줌마가 기차 장난감을 가리키며 "이게 누구야?"라고 묻자 "Thomas" 라고 대답해서 깜짝 놀랐다. 토마스라고 엄청 유명한 기차 캐릭터가 있는 모양이다.
그 거친 Remi는 결국 백금발 꼬마의 장난감 하나를 부숴버려서 아줌마한테 혼이 났다.

내릴 때가 다 되어가길래, 아줌마에게 어디 사냐고 물었더니 Fribourg에 산다고 했다. 프랑스어여서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다. 친절하게도 연락처를 적어주며 Fribourg에 오면 전화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거기 갈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고마워서 연락처는 받아두었다. 지명이 프랑스어길래 거기는 프랑스어를 쓰는 동네냐고 물었더니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함께 쓴다고 했다. 그럼 이 아줌마는 영어, 독일어에 프랑스어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딸애가 자기는 Hanya, 남동생은 Remi, 성은 Mcmillan이라고 적어줬는데 이 아줌마는 자꾸 아들을 "헤미"라고 부르는게 불어식 발음이었다. 나보고 자기 이름도 "헤베카"라고 알려주었다.

옆 좌석의 스위스 가족 덕에 정신없이 떠들다 취리히역에 내려서 시계를 봤더니 11시 58분이었다. 원래는 11시 44분 도착 예정이었다. 갈아타야 하는 인터라켄행 열차가 12시 출발인데 큰일이었다. 유럽 기차는 정시출발 정시도착으로 유명하다더니, 당했다 싶었다. 정신없이 뛰다가 전광판에서 인터라켄행 열차가 바로 옆 플랫폼인 걸 확인하고 간신히 탔다. 타고서 몇초 후에 열차가 출발했다.


인터라켄 서역에 내려 근처 대형마트 ATM에서 400 CHF(스위스프랑)을 찾았다. 스위스는 유로화가 통용되지 않는 국가다. 스위스프랑은 유로보다 조금 쌌다.
호스텔에 갔더니 4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해서 1층 복도에 있는 락커에 짐만 넣어놓고 도로 나왔다. 남는 시간 동안 아빠가 부탁한 맥가이버 칼도 살 겸, 좁은 인터라켄 시내를 쏘다녔다. 맥가이버 칼 가게에 갔더니 칼이 빨간색만 있는 게 아니라 색도 고를 수 있고 이름도 새겨준다고 해서 블랙으로 고른 후 아빠 영문 이름을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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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맛있는 초콜릿을 팔던 초콜릿 가게

침 질질 흘리다가 결국 못참고 사 먹었다. 다 먹어보고 싶었지만 역시 돈이 문제였다.

인터라켄 시내는 좁아서 구경할 것도 없고, 저녁 때까지 시내에서 죽치고 있자니 시간이 애매해서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 체크인을 했다. 우리 방에는 남자애 세명이 있었다. 한명은 흑인이었고 두명은 동양인이었다. 둘 중 하나는 나에게 한국어로 말도 걸길래 한국사람인가보다 하고 짐작했다. 근데 걔네가 한국어로 몇마디 말을 하더니 그 뒤로는 나한테 계속 영어로 말을 걸었다. 아니 한국어 할 줄 알면 한국어로 말을 걸지 왜 자꾸 영어야? 하는 생각에 비위가 좀 상했지만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어디 사냐고 묻길래 서울이라고 했더니 갑자기 한국말로 "대학교 어디 가요?"라는 굉장히 이상한 질문을 했다. 질문의 의미는 '재학중인 대학이 어디냐'인 것 같았는데 그럼 보통  "어느 학교 다녀요?" 라고 묻지 않나?
뭔가 이상해서 넌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더니 US에서 왔단다. 한국어가 서툰 교포같았다. 그래서 계속 영어로 말을 시켰군.

짐을 정리하고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저녁은 벼르고 벼르던 치즈퐁듀였다. 스위스에 왔으니 치즈 퐁듀는 먹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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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듀 찾는 한국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인터라켄 시내에 한국어로 된 홍보 간판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난 저 가게가 아니라 딴 가게 가서 먹었다.) 쉬니제 퐁듀라고 하는 고기 퐁듀는 샤브샤브 비슷한 건데 한국사람들 입맛에 잘 맞다고 했다. 치즈 퐁듀가 정말 별로라는 소문을 들은 부모님은 치즈 말고 초콜릿 퐁듀 같은 거나 먹으라고 하셨었다. 그치만 난 스위스에 왔으니까 죽어도 치즈 퐁듀를 먹어야만 했다. 지펠 광고에서 심은하가 먹던 건 치즈였나, 초콜릿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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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인터라켄엔 한국 사람이 너무 많은 모양이다. 친절한 한국어 메뉴판이 갖춰져 있다.
퐁듀와 스위스식 토스트를 먹겠다고 했더니 점원이 치즈 퐁듀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말렸다. 나중에 먹어보고서야 안 거지만 더 시켰으면 큰일 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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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치즈 퐁듀를 시켜먹은 Chalet restaurant

치즈 퐁듀 별로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고 가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치즈 퐁듀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맛있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지금부터 치즈 퐁듀 먹는 법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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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그릇을 놓을 알콜 램프가 있군요. 마치 중학교 과학시간에 보던 에탄올 램프와 삼발이 같아요. 저기 바구니에 가득 담긴 빵과 음료수도 보이네요. 음료는 와인이 아닌 콜라랍니다. 우리는 아직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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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하 언니가 먹던 네모반듯하게 썰린 빵을 기대하고 간 저는 조금 실망했어요. 대충 썰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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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드디어 치즈 그릇이 나왔어요. 저는 빵을 꼬챙이에 찍어 치즈에 풍덩 담갔답니다. 사실 이게 순수한 치즈가 아니라 백포도주에 치즈를 녹인 거란 이야기는 들었어요. 어린이는 술맛이 날까봐 조금 무서웠어요. 아니나 다를까, 빵을 풍덩 담가 찍어먹었더니 입에 넣자마자 알콜 향기가 한가득이더군요. 어린이는 술맛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알콜이 어느 정도 증발할 때까지 기다렸어요. 저는 알콜은 끓이면 기화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아는 똑똑한 어린이랍니다. 알콜이 어느정도 증발한 것 같아서 저는 끓고 있는 치즈 윗부분에만 살짝 살짝 빵을 찍어먹었어요. 그런데 빵을 푹 담그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더군요. 질긴 빵을 백포도주+치즈에 적셔야 촉촉해지는 건데 제대로 적시지 않았더니 빵은 질기고 치즈는 짜고.. 이가 약한 어린이는 힘들었답니다. 그렇지만 역한 술맛보다는 질긴 빵을 씹는 게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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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좀 날아가고 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어요. 치즈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기름이 분리되기 시작한 거지요. 아주 식용유처럼 누런 기름이 둥둥 떠 올랐답니다. 참, 내가 이런 걸 다 먹었구나 싶어서 어린이는 조금 슬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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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퐁듀의 최후를 보고 계시는군요. 치즈는 눌어붙고, 기름은 완전히 분리되었어요. 하지만 어린이는 놀랍게도 치즈 퐁듀 2인분을 끝까지 다 먹어치웠답니다. 제 동생은 저보다도 더 어린이라서 치즈 퐁듀에 거의 손을 대지 못했어요. "누나, 나 치즈 꼬랑내 때문에 미치겠어. 빨리 나가자."라고 칭얼댈 뿐이었지요. 어린이는 이상하게도 치즈 꼬랑내는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어린이는 이미 너무 유러피언에 동화된 걸까요.



어쨌든 다시 먹고 싶지는 않지만 한번 쯤은 먹어볼 만한 음식이었어요. 사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괴로운 기억이 많이 옅어져서 다시 먹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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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6 02:35 2007/08/26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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