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 of Concrete Gables :: 누가 이 책을 빌려보았을까?

Anne of Concrete Gables




통학의 즐거움이자 유일한 장점을 꼽자면, 책을 읽을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리딩 과제는 절대 책상에 앉아서 하지 않는다. 무조건 지하철에서!
얇은 영어회화 아티클이 됐건, 두꺼운 영문법 책이 되었건 간에 지하철에서 읽으면 어찌나 집중이 잘 되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지.

숙제가 없는 날은 소설을 읽는다. 등하굣길에만 읽어도 이틀이면 한권이 끝나니까 일주일에 서너권은 읽게 되어서 요즘 들어 팔자에도 없는 다독을 하고 있다.


오늘은 예약 신청을 해 두었던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가 반납되었다는 문자가 와서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받아 왔다. 저녁 약속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강남역의 투썸플레이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데 처음 몇 장을 넘겨보니 연필로 표시한 낫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을 전에 빌려갔던 사람이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낫표로 표시해 둔 모양이었다. 낫표 속의 문장들은 한두 문장일 때도 있었고, 열 문장이 훨씬 넘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두세 페이지마다 낫표가 있더니, 뒤로 갈 수록 낫표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낫표로 열고 닫은 문장들을 꼼꼼히 살펴보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파악이 되더라는 것이었다. 낫표 안에는 '넉넉하지 못했던 유년의 기억들, 무덤덤한 듯 속 깊은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 낯선 대도시에서 느끼는 쓸쓸함, 늘 주고받는 의미없는 대화의 공허함, 지루한 일상 속의 무력감'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연필 자국을 남긴 사람은, 그리 풍족하지는 않은 집에서 자랐고, 무뚝뚝해도 정이 깊고 든든한 엄마가 있으며, 지방에서 상경해 삭막하고 쓸쓸한 수도의 모습에 낮설어 하다가, 요즘 들어는 일상이 지루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변변치 못한 자취 생활이나, 그저 입에 풀칠하기 위해 출근하는 직장인의 비애에 유난히 공감하는 걸 보면 분명했다.


나보다 앞서 이 책을 빌려갔던 사람은 누굴까, 궁금해졌다. 여성 작가의 소설집이고, 단편 소설 속의 화자들이 대부분 20대 여성인데, 여기에 낫표까지 해 가며 읽을 정도면 여학생일 것이다. 그리고 구직의 어려움, 직장애사에 서럽게 공감하는 걸 보니 3학년 아니면 4학년이었다.

3학년이 정말 그런 나이인가 보다. 그냥 우울하고, 서럽고, 허무하고. 나만 해도 벌써부터 눈 앞이 캄캄하고, 졸업하면 제 앞가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은데 4학년은 대체 어떤 기분일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나 말고도 많은 3학년들이 우울해보였다.


책 뒷표지에 독서카드라도 꽂혀 있으면 누군지 알 수 있으련만. 요즘은 전부 전산처리가 되니 알 길이 없었다.

도서관에도 아주 오래된 책들은 독서카드가 붙어있다. 책 모서리에 푸른 곰팡이가 슬어있는,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 쓴 실험심리학 책을 끌어내려 먼지와 함께 시큼한 산 냄새를 들이마시며 색인을 뒤지다가 속뒷표지를 보니,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1990년에 이 책을 빌렸던 사람들의 이름이 있었다.



그렇지만 『침이 고인다』는 출간된지 6개월 밖에 안 된 책이니까 독서카드 같은 게 있을리 없었고, 그냥 나처럼 갓 나온 따끈따끈한 소설들을 좋아하는 여학생 하나가 있었으려니 추측하는 게 다였다.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우리가 만난다 한들 <귀를 기울이면>처럼 풋풋한 연애담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아휴, 졸업하면 뭘 해먹고 사나요. 제때 졸업이나 할 수 있을까요."하는 우울한 얘기들만 오갈 것 같아서 그런 상상도 그만 두기로 했다. 1990년에 실험심리학 책을 대출해갔던 선배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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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00:52 2008/03/2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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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eter 2008/03/22 01:13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왜 누나가 쓴 글을 읽으면 뭔가 손맛처럼 착착 감기는 느낌이 들지?

    • 까망머리앤 2008/03/22 22:41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엉덩이를 찰싹 얻어맞은 것 같은 알싸한 손맛? ㅋㅋㅋㅋㅋㅋ

    • Peter 2008/03/23 00:54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캬~ 비유가 멋지네 ㅎㅎ
      어제 그동안 밀린 누나 글 읽다가 늦게 자서 오늘 아침 보강 지각했잖아 ㅋㅋㅋ (엥? 늦게 자면 얼마나 늦게 잤다고 ㅋㅋㅋ)

    • 까망머리앤 2008/03/23 23:51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오호, 보강에 지각할 정도로 내 글이 재미있었단 말이지

  2. idreamlist 2008/03/23 23:50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맞아 ㅋㅋㅋㅋ 왠지 누나 글은
    땡기는 맛?! 이 있어 ㅋㅋㅋㅋㅋ

    • 까망머리앤 2008/03/24 00:10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내 블로그에 이런 애독자들(두명)이 있었을 줄이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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